2020년 9월 6일 일요일

공정무역의 선구자, 마이클 배럿 브라운을 기억하며 (2016.11.14)

 2015년에는 유난히 많은 거인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공정무역 운동에는 ‘시장 안에서 시장에 저항하라(In and against the market)’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알려진 마이클 배럿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있다.

2015년 5월 7일, 신좌파 운동에 투신한 사회주의자이자 경제학자이며 노동자 교육에 헌신한 교육자, 공정무역 운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마이클 배럿 브라운이 활동가로서의 삶을 마쳤다. 향년 97세 (1918-2015)
좌파 경제학자로서 New Left Review (1960) 창간, 버트란드 러셀이 주도한 Peace Foundation 설립 및 재단 기관지 Spokesman의 창간(1963), 노동자 자주관리 연구소 (Institute for workers’ control) 설립(1968) 및 사회주의 경제학자 컨퍼런스의 출범(1970) 등 영국 진보 운동의 주요 사건들에 주도적인 역할로 참여하며 작지 않은 발자국을 남겼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에드워드 톰슨과 같은 다른 신좌파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공산당원이었던 마이클은 구소련이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무력 진압하는 것을 보고 공산당을 탈당한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기존 공산주의의 정치, 경제에 실망한 이들은 문화, 정치, 경제 영역에서 각각 ‘꾸준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이의 일환으로 기존의 노동과 계급문제에만 천착했던 기존의 좌파들과 달리 시민권 운동, 성소수자 권리, 젠더 문제 등 광범위한 사회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이클은 ‘꾸준한 경제 혁명’의 일환으로서 노동자의 교육, 정치 세력화, 노동자 자주관리 제도를 신좌파의 중요 의제로 보았다.
그의 인생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 노동자 교육이었다. 그는 30세이던 1948년부터 에섹스, 쉐필드 등지에서 광산 및 철강 노동자들을 가르쳤고 이들을 노조 활동가, 지방 및 중앙 정치인들로 육성했다. 사우스 요크셔의 웬트워스 캐슬이라는 지역에 노던 칼리지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았으며, 이 학교는 오늘날에도 연간 6천명이 수학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평생 교육기관으로 설립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고 있다.
1983년 은퇴 후, 노동당의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이 이끄는 런던 광역시 의회 (Greater London Council)의 지원으로 전 세계 커피 생산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네트워크 조직인 ‘제 3세계 정보 네트워크-약칭 트윈’ (Third World Information Network; TWIN- 후에 비영리 법인이 됨)을 설립하였으며, 이 조직을 기반으로 영국 공정무역 운동의 선구적 무역회사인 트윈 트레이딩 (TWIN Trading)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마이클이 트윈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트윈(비영리단체)은 영리, 비영리 단체들과의 협업을 통해 커피 무역 전문회사인 트윈 트레이딩에 이어 공정무역 초콜릿 전문 기업인 디바인, 커피 전문 기업 카페다이렉트를 설립하여 공정무역 운동의 확산의 기틀을 다졌다. 트윈 트레이딩은 비영리 단체 트윈의 회원인30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와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들 중 다수가 트윈 트레이딩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디바인의 최대주주도 생산자 협동조합인 쿠아파코쿠이다. 이처럼 생산자가 판매회사의 지분을 소유하는 것은 노동자 소유 기업 개념의 국제적 확장으로 볼 수 있다.
신좌파 운동, 노동자 교육, 공정무역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는 얼핏 보면 서로 관계가 없는 분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 가지 활동 분야는 모두 경제학자로서 그가 주장한 현실 이해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이클이 공산당을 떠나 신좌파 운동에 가담한 것은 기존의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적 공산주의가 아닌 분권적이고 민주적인 정치, 경제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교육, 정치 세력화, 노동자 소유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에 대한 신념 또한 경제 내에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정무역은 이런 생각을 국제 경제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에서 강화되어 가는 대기업들의 경제권력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유력한 수단 역시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나는 그의 생각을 요즘 언어로 표현한다면 경제민주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제 민주화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김종인 대표의 영향으로 기업에 대한 독일식 공공 통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로버트 달의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에서 볼 수 있듯 자원과 부의 집중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퇴보에 대항하여 경제 시스템 내에서 민주적인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한다는 보다 넓은 개념을 경제민주화로 보는 것이 보다 총체적인 이해가 아닐까 한다. 구체적인 실행에 있어서는 재벌 규제와 같은 국가 정책적인 차원의 실행, 노동자 소유 및 노동자 자주 운영, 기타 이해 당사자의 참여 등 기업 의 이해 당사자들이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 수준의 변화, 공급 사슬의 자원 집중 문제에 대한 대응 운동으로서 농업 협동조합이나 소비자 협동조합 등의 결성 등과 같은 활동들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런 움직임 모두를 경제 민주화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마이클이 노동자 교육에 헌신한 것은 노동자가 깨어나 조직화하여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경제 권력의 집중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고, 공정무역에 헌신한 것은 조직화된 농민이 권력화된 대기업과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공급사슬의 경제 민주화가 개발도상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디바인 초콜릿의 소유권을 농민 협동조합이 가질 수 있도록 한 것도 그의 이런 신념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신좌파 운동 참여, 노동자 교육, 공정무역의 세 가지 사회활동 모두 경제학자로서 마이클 배럿 브라운이 보여준 앎과 실천의 일치라고 볼 수 있다.
처음 한국에 공정무역이 들어올 때, 공정무역 단체들조차도 흔히 ‘착한 소비’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착한 소비’는 소비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공정무역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는 단어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 공정무역 소비자로서 공정무역의 구매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에 투표하는 행위이며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에서, 점점 커져가고 있는 불평등, 경제 권력의 집중은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근본부터 위협하고 있다. 소유와 권력의 집중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 것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아가는 지속 가능한 미래에 투자할 것인가? 마이클 배럿 브라운의 학문과 삶에 대해 주목해 보는 것은 한국 내 공정무역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마이클 배럿 브라운의 업적에 깊은 존경을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바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