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규석 선생님의 “윤리적 소비”를 읽고
개인이든, 조직이든, 운동이든, 또는 “진영”이든, 좋은 말만 하고 칭찬 해 주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멀리한다면 발전하기 어렵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거기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며 오류를 바로잡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개인과 조직은 자기발전을 달성할 수 있고, 운동이나 조직은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하신 천규석 선생님께서 쓰신 “윤리적 소비”는 시중에 나와있는 공정무역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공정무역을 가혹하게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비슷한 중량감으로 공정무역에 대해 쓰여진 책도 미처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쓰여진 책이어서, 공정무역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깊이 성찰해야 할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후 존칭 생략) 더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책의 전반을 통해서 드러나는 세계관과 공정무역의 세계관이 많은 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규석이 이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 세계관은, 공정무역에 대한 공격적인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공정무역 운동의 세계관과 겹치는 부분이 더 많다. 특히, 천규석이 일련의 역사적 사회진화과정들, 인클로저 사태, 약탈적 식민 무역,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가난한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으로서 같은 맥락의 연속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정무역 활동가로서 필자가 오늘날의 시대와 사회를 해석하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천규석은 지역의 소농공동체에 기반한 지역적 소비만이 윤리적이며, 자급소비가 아닌 모든 형태의 공정무역은 윤리적 소비라고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고,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여 공정무역을 비판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의 세계화 무역에 문제점이 많다면 그 무역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거나 재검토해보는 것이 가장 온당한 일이다”라고 하며, “세계화 무역의 다단계 유통에 따르는 수많은 모순점을 약간 보완하는 선에서 스스로 그 이름을 ‘공정무역’이라 짓고,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폼도 아닌 기호식품의 수입을 정당화하는 것은 눈도 안 감고 아웅 하는 속임수가 아닐까”[1] “현 체제의 영속에 일조하는 반민중주의”이며, 공정무역의 직접 수혜자는 농장주들의 조합과 농장주일 뿐, 농장노동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가게라는 데서도 생산자에게 현지가격보다 두 배로 사격을 더 주고 수입하여 생산자의 생활과 생산이 지속되게 지원하는 명목으로 네팔산 커피를 판다고 한다.” “히말라야 오지의 산악국가에까지 자급 대신 세계 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는 장삿속을 인도적 지원으로 위장하는 양두구육은 노골적으로 돈벌이에 나선 세계화 무역보다 오히려 더 역겹다.” [2]
이 책이 쓰여진 것은 2010년,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공정무역 운동 진영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공정무역에 대한 유사한 비판이 최근까지도 종종 눈에 띈다. 김성희 한살림 홍보지원부장은 지난 10월 참여사회 기고문에서 농민들을 자급경제에서 벗어나 수출용 단일 작물재배에 매달리게 한다고 비판하며,[3] 최근 이동연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는 최근 “기만적 힐링”의 사례를 들며 “공정무역은 중산층의 소비트렌드에 불과”[4]하다고 폄하한 바 있다.
아름다운가게는 과연 “히말라야 오지의 농부들까지 세계 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중산층의 호사취미일 뿐일까?
“현 체제의 영속에 일조하는 반민중주의”이며, 공정무역의 직접 수혜자는 농장주들의 조합과 농장주일 뿐, 농장노동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은 명백하게 공정무역의 발생 배경, 운영원칙, 실제 사례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는 즉 불공정한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농민, 노동자의 조직화, 공동체 만들기를 통한 사회적 변화가 공정무역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다. 하지만 천규석과 같이 농민공동체를 중시하고 시장근본주의적 세계화가 농민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 운동가가 공정무역에 대해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동안 공정무역을 이끌어 온 아름다운가게나 다른 공정무역단체들이 공정무역을 어떻게 규정하고 알려 왔는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천규석은 흥미롭게도 혁명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맥락을 뒤집어 역사적인 혁명들이 진정으로 못 가진 자들을 위한 혁명이 아니었다는 점을 조명하면서, 인클로저 운동을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이라는 표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수 많은 개발도상국 농민들이 생존의 기반을 위협당하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직접적으로 선진국의 시민들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나, 농업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기는 선진국 시민들, 특히 한국과 같은 신흥개발국가 시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경제적 파국뿐 아니라, 천규석이 지적하는 것처럼, 문화적, 도덕적, 그리고 생태적 파국을 향해서 달리고 있다.
이러한 총체적 파국을 일컫는 말로 “종말혁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종말혁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소농두레공동체혁명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공정무역이 원하는 개발도상국의 사회적 발전의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천규석의 비판에 답하자면, 공정무역은 서구사회에서 보다 많은 소비자들이 개발도상국의 농민들과 정서적인 연대감을 키워가면서 다국적 기업 위주의 세계화된 농산물 상품시장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며, 문제 이해의 기본이 되는 개발도상국의 빈곤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많은 공정무역단체들이 독자적인 사업으로 공정무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농민들의 입장을 옹호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저항운동을 하는 진보적 시민단체들과의 연합작전으로서 공정무역운동을 해왔다. 역사적으로, 공정무역 제품의 매출액이 늘어난다는 것은, 개발도상국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제품을 통한 캠페인”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또 불공정한 경제시스템에 이의제기를 하는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공정무역제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관계로 큰 시너지를 창출해 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정무역이 기존의 불공정한 경제시스템, 무역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다는 점에서, 천규석의 지적과 달리 무역과 경제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해 왔으므로, 공정무역이 문제의 근본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은 부당하다.
농장주들의 협동조합이나 농장주에게만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공정무역이 농장주가 아닌 농민들의 협동조합과 거래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데에서 온 오해다. 특히 커피나 카카오의 경우, 미국 공정무역 단체에서 영세농들의 공동체가 아닌 고용노동을 사용하는 농장을 공정무역의 범주에 넣자고 주장한 것이 2010년 전체 공정무역 진영과의 절연을 불러왔을 만큼, 영세농들의 공동체와 거래한다는 원칙은 공정무역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초기의 공정무역에서 고용노동은 공동체의 소규모 수공예 작업장, 장애인 시설 사회적기업에서 구매하는 물품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고, 커피, 카카오 등 농산물 공정무역에서는 고용노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장과의 거래는 공정무역의 영역에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 홍차, 설탕과 같이 영세농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기 어려운 상황들이 감안되어 예외가 인정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공정무역활동가들의 많은 비판을 초래한 바 있다. 따라서 농장주들만이 공정무역의 혜택을 받으며, 노동자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진술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한 공정무역의 핵심은 다단계 유통을 약간 보완하고 농민에게 돌아가는 금전적 이익을 확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체 형성을 통해 농민들이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화된 공동체로서 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다. 천규석의 이해와 달리, 유감스럽게도 많은 나라에서, 그리고 특히 아름다운가게가 거래하고 있는 네팔에서, 현금작물의 대안은 자급농업이 아니라 삶의 붕괴, 좌절 이거나 도시로, 해외로의 이주노동이다. 아름다운가게의 활동은 농장주들의 협동조합이 아닌, 농민들의 협동조합과 함께 하고 있으며, 기존의 커피 구매자들이 제시하는 가격보다 유리한 가격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품질을 관리하고 시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투자한다든지, 보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조합 운영의 방법론을 교육한다든지, 역량강화와 사회의 질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정무역은 공동체를 복원하고 사회적인 역량을 강화하는데 투자함으로써 천규석이 말하는 총체적인 파국을 향해 달리는 “종말혁명”의 톱니바퀴를 거스르기 위한 투쟁이다. 천규석은 이 책에서 공정무역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여 공정무역을 폄하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 세계관은 오히려 공정무역 활동가들이 공정무역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개발도상국 농민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정무역이 기존 무역 시스템, 경제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이해를 확산하는 캠페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무역이 현 체제의 영속에 기여한다는 이 책의 문제제기는 근거 없다. 천규석이 말하는 “소농두레공동체혁명”의 지향이 공정무역이 추구하는 사회적 발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오히려 농민운동과 공정무역운동이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보는 독자로서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정무역이 근본적으로 탄소 발자국을 남기는 점, 공정무역이라고 해서 마음껏 소비를 늘리는 것은 생태적인 삶이 아니라는 점 등은 공정무역운동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로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공정무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소비를 늘릴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소비를 공정무역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 소비자들이 구매를 통해서 먼 나라에 있는 농민들이 결국은 상관없는 남이 아니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내야 할 동반자들이라는 것.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여정을 함께 걸어 가야 한다는 것.
[4] 이동연 (2013) “힐링 없는 힐링문화”,한겨레 신문 인터넷판 2012년 1월 7일자, 1월6일 접속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36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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